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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갑각류크리스챤이라는 책을 읽었다. 껍질이 두껍다는 새우를 갑각류라고 한다. 크리스챤이 진실이 없이 거짓으로 가득한 모습을 고발하고 있다. 한국교회의 허위의식을 고발한 것이다. 손봉호교수도 말하기를 한국교회는 이처럼 부흥하고 성장하고 한국사회는 경제적으로 부흥하였는데 행복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부패지수가 강하고 한국개신교는 이 사회에서 비판을 받고 목사는 존경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참과 거짓속에서 우리는 참을 지향하는 기독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화있을진저라고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너희는 교인 한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외식이라는 것은 위선을 말합니다. 바같외 꾸밀 식이라는것입니다. 목사가 술담배를 먹으면서 돈이나 여자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도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꾸며가지고 말하는 것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간증으로 말하는 사람들 그리고 연예인을 동원해서 간증을 하는일들은 본질을 모르고 하는 일입니다. 천국에 대한 간증을 통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일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110에서104등 행복지수 부패지수46

우리 나라 한국사람들의 의식중에 이처럼 1등만 좋아하는 의식이 있다. 95점을 맞아서 3등이고 70점맞고 1등하면 1등을 좋아하는 것이다. 한국사람들은 입신양명을 좋아합니다. 아들 하나는 부모에게 용돈도 주고 부모에게 전화도 하고 그러는데 평범한 사람이고 한 아들은 전화도 하지 않고 용돈도 주지 않고 그러나 장관입니다. 그러면 어떤 아들이 효자입니까? 바로 입신양명한 아들이 효자인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유명인의 인기에 의존하지 않는다.

교회 혹시 당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도구는 아닌가? 기업은 긍정의 힘이 필요하지만 교회는 은혜의 힘이 필요하다. 교회가 은혜의 힘이 아닌 긍정의 힘을 강조할수록 그 교회는 점점 더 기업처럼 변해갈 수밖에 없다. 은혜의 힘속에는 죄와 회개가 있다. 긍정의 힘속에는 확장만이 있다.

목사이기전에 나는 누구이고 장로이기전에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는 것이 doing일까 아니면 being일까? being이라고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는 관계라는 단어를 그중심에 두게 된다. 이관계를 생각할 때 상호간 가장 중요한 단어는 솔직함 진실함이다.

전도 필살리 스토킹 전도법 진돗개전도법의 시대는 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최신 유행의 각종전도법이 아니다. 교회에서 사라져야 할 단어는 전도왕이다. 고구마 전도왕 감자전도왕 양파전도왕 진돗개전도왕 수사슴전도왕등등 이런 전도왕들이 넘칠수록 기독교는 교회는 개그콘서트가 된다. 한 인간의 회심은 이런 각종 왕들의 기교에 달린 것이 아니다.

차범근감독과 최순호감돌이 쎈기도로 붙었다. 한달란트를 받은 나와 당신 행여나 우리는 하나님을 교회속에 갇힌 존재로 전락시키지는 않는가? 기도 세게 해주세요 라는 말역시 교회에서 사라져야 할 것중 하나다. 생각없는 목회자들이 적극 권하는 책중 시크릿이라는 책이 있다. 인격적 하나님과 우주의 에너지를 혼동시키는 책이다. 성경의 하나님은 집붕해서 쎄게 전파를 보내면 반응하는 그런 에너지가 아니다.

갑각을 다지는 기독교 베스트셀러 감상법 성도들의 손에 잡힌 책수준이 한국교회 전체의 수준읻. 교보문고의 어느직원이 기독교출판계의 불황이유를 이렇게 꼬집었다. 사람들이 성경을 안사요 그러니까 덩달아 기독교책들도 안팔리죠. 교회에서 성경구절을 스크린에 죄다 싸주니까 성경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는 세상이 되었잖아요? 보통 사람들이 성경 사러와서 기독교책들도 몇권 같이 사고 그랬거든요. 이제 기독교안에는 불교와 달리 파워있는 저자가 없어요 이 사람이 쓰면 확실히 팔린다는 저자가 속직히 기독교분야에는 전무해요.무엇보다 기독교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나날이 나빠지면서 기독교책들도 덩달아 피해를 보고 있지요.

이게 다 붉은 악마탓이다. 당신은 하나님을 사소한 하나님 이상한 하나님으로 만들고 있는가? 내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하나님의 간섭하심이라고 인정할수 있다면 교회가 지금보다는 상황이 좀 나아지지 않을까? 내마음대로 되면 하나님으 인도하심 그게 아니면 사탄의 방해? 이래가지고서야 무슨말이 통할까?

신비주의에 낚인 갑각한 성도

영혼 영적이라는 단어에 훅 낚인태 당신도 아주 교묘하게 너그러워진 십자가를 탐하고 있는가? 방언에 대한 많은 사람의 정직한 커밍아웃이 필요하다. 방언과 관련해 더 이상 비겁한 침묵의 카르텔은 사라져야 한다. 방언은 둘중 하나다. 진짜 아니면 엉터리! 이 중간은 없다. 대다수 교회지도자는 마치 그 중간에 있다는 식의 어정쩡한 태도로 성도들에게 혼란을 줄뿐 아니라 방언과 관련한 각종 부작용에 단단힌 한몫은 거들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나는 다시 한번 말하고 싶다. 교회내에서 울려 퍼지는 방언은 100퍼센트 엉터리다.

나는 바울에게 열등감을 느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회심의 롤모델을 향한 열등감이 아닌 말씀을 향한 열정이다. 가벼운 회심은 손쉬운 변절로 이어진다. 진돗개전도법으로 회심한 사람은 행여 불교가 사냥개포교법이라도 발동하게 되면 단박에 그 포교의 대상이 될 것이다. 교회안은 경박하기 이를데 없는 회심으로 넘친다. 세상에! 영원히 달린 구원의 문제가 무슨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라면 한그릇 사먹는것보다 쉽다니---

셀프소명자. 이세상에는 성도들에게 자신의 피와 살을 제공하는 목사와 성도들을 양고기로 구워 먹는 목사가 있다. 목사가 진정 좁은길인데도 목사 아버지가 아들에게 목사를 시키고 싶어할까? 좁은길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내머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은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들이다. 과연 그들은 자신의 아들이 대를 이어 독립운동가로 살기를 바랐을까? 아마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길은 진짜로 좁은길이었으니까. 목사가 영광의 길이 아니라 진정 좁은길이 될 때 목사도 살고 교회도 살 것이다.

갑각한 갑각설교의 한사례 설교자가 맥도날드 직원이 된다면 그의 설교는 맥도날드 햄버거 정크푸드가 되리라. 힘버거속의 고기가 썩었는데 그 썩은 고기를 감추려 양배추 피클 토마토같은 것으로 마구 섞어 겉으로 보기에만 맛깔스러운 햄버거를 먹은적이 있는가? 말씀은 정작 사라지고 각종 화려한 노래들과 공연으로 난리치는 예배가 바로 그런 힘버거다.

여보 오늘 하나님이 밥대신 짜장면을 먹으라 하시네요! 오늘날 하나님앞에 특별한 종은 더 이상 없다. 당신과 나 우리 모두가 다 특별한 종이니까

교회에서 사라져야 할 단어는 영적인 일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은 영적이고 동시에 육적이다. 이둘을 구분하기 시작할 때 소위 영적인 일을 하는 사람과 육적인(세상적인)일을 하는 사람을 구분해 차별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다 똑같다!

송광사의 예불과 트리에스테 커피의 공통점은? 오늘날 세상의 각종 기법을 교회속에 예배속에 집어넣은 곳들은 더 이상 교회가 아니가. 새벽 3시반이면 어김없이 송광사에는 새벽예불이 진행된다. 지난 천년이 넘는 세월 변함없이 지켜온 엄숙한 예식이다. 그 길고 긴 시간동안 산천은 수도없이 바뀌었지만 송광사의 새벽예불은 바뀌지않았다. 세상의 변화를 모방하고 쫒아가기 위해 여념이 없는 우리 교회의 모습과 극명하게 대비된다. 세상과의 소통이라는 미명하에 우리가 결코 잃지 말아야 할 우리의 본질 마저도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볼 시간이다.

말발의 설교 성령의 설교 가벼운 강단 경박한 설교 과연 언제쯤 내존재를 근원에서부 흔들어 깨우는 그런 말씀을 만날 수 있을까? 자신의 말발이 아닌 성령에 사로잡힌 설교자, 그의 불꽃같은 말씀에 사로잡혀 시간가는것조자 잃어버린채 내영혼이 마구 흔들리고 있음을 마지막으로 느낀때가 언제였던가? 30분 설교가 끝나고 난후 머리에 남는 것은 설교중간에 나왔던 허접스러운 농담정도---설교는 넘치지만 말씀의 능력은 사라진 슬픈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신유은사? 교회에서 자꾸 작두탈래?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무당이 필요없다. 치유집회에서 정말로 암을 치료했다면 그 사람은 당장 그 다음주 타임지 커버스토리에 나와야 한다. 세상의 모든 돈을 다 가진듯한 스티브잡스가 자신의 암을 없애기 위해 안써본방법이 있을까? 하지만 그도 죽었다. 스티브 잡스같은 사람도 암에 걸려죽는데 누구누구는 치유집회참석해서 암이 나았다고? 사방팔방에 넘치는 치유집회건수로 볼 때 기독교인의 암사망률은 비기독교인보다 현저하게 낮아야 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설교자냐 교회ceo? 설교자가 되고 싶은가? 근사한 교회의 사장이 되고 싶은가? 설교는 크게 울림이 있는 설교와 아무런 울림이 없는 설교로 나눌수 있다. 울림을 주는 설교자는 무엇보다 자신에게 절망한다. 자신에 대한 처절한 절망에서부터 설교의 울림은 시작된다. 하나님앞에 자신을 비추어 절망하며 울부짖는 설교자는 성령을 의지한다. 그런 설교자는 무엇보다 강단에서 까불지 않는다. 설교자는 결코 청중의 눈치를 보거나 외쳐야 할 선지자적 메시지를 외면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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